무령왕릉, 벽돌을 «눕혔다 세웠다» 번갈아 쌓아 아치를 만들었다
백제 무령왕릉은 다른 삼국시대 왕릉들과 다르게 흙무지 속에 나무널이나 돌방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방을 만들었습니다. 벽돌을 단순히 옆으로 쌓으면 벽은 세울 수 있어도 천장은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천장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터널 모양입니다. 벽돌만으로 이 곡선을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벽돌 다섯 장, «네 장은 눕히고 한 장은 세운다»
무령왕릉의 벽은 벽돌을 같은 방향으로만 쌓지 않습니다. 벽돌 네 장을 옆으로 눕혀 쌓은 뒤(길이모쌓기), 그 위에 벽돌 한 장을 세로로 세워 쌓는(작은모쌓기) 방식을 반복합니다.

⇒ ★이 반복은 6세기 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에서 들여온 벽돌무덤 축조법의 계보를 잇습니다. 눕힌 벽돌이 벽의 «면»을 채우는 동안, 중간중간 세운 벽돌이 그 층을 가로질러 물리며 벽체 전체를 하나로 엮어 줍니다. 벽돌만 반복해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 다른 쌓기 방식을 규칙적으로 번갈아 배치한 구조입니다.
위로 갈수록 벽돌의 «모양»이 바뀝니다
무령왕릉의 방(현실)은 남북 420㎝·동서 272㎝·높이 293㎝ 크기입니다. 동서로 마주 보는 긴 벽은 아래에서는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7~8단째부터 안쪽으로 좁혀지기 시작합니다.
⇒ ★★여기서 쓰인 벽돌은 아래쪽과 «다른 벽돌»입니다. 곧게 쌓을 때는 직육면체 벽돌을 그대로 썼지만, 오므라드는 구간부터는 제형(사다리꼴 단면) 벽돌을 섞어 썼습니다. 직육면체 벽돌만으로 곡선을 내려 하면 벽돌 사이에 쐐기 모양의 빈틈이 생기지만, 벽돌 자체를 미리 사다리꼴로 구워 두면 그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벽돌의 «모양을 바꾸는 것»으로 «쌓는 방향을 바꾸는» 문제를 해결한 셈입니다. 남북의 짧은 벽은 그대로 수직으로 올라가고, 동서로 마주 보는 두 긴 벽만 이렇게 안쪽으로 오므라들며 만나 터널형 아치 천장이 완성됩니다.
벽돌무덤이 흙무덤과 다르게 짊어진 문제 — 물
벽돌은 흙보다 단단하고 정교한 형태를 만들 수 있지만, 새로운 약점이 하나 생깁니다. 벽돌과 벽돌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무령왕릉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 무령왕릉은 1971년, 바로 옆 송산리 6호분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습니다. 무령왕릉 자체에도 이 문제에 대한 대비가 있었습니다. 널방과 널길의 경계 지점에서 시작해 널길 바닥 밑으로 남북 187㎝ 길이의 배수구를 벽돌로 따로 만들어 둔 것입니다.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방을 만드는 기술과, 그 방으로 물이 들지 않게 하는 배수 기술이 함께 갖춰져야 이 무덤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누구의 무덤인지» 스스로 밝힌 유일한 왕릉
무령왕릉이 한국 고고학에서 특별하게 꼽히는 또 다른 이유는 구조가 아니라 안에서 나온 문서입니다. 널길 입구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매지권(買地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을 주고 무덤 터를 샀다는 내용의 도교적 기록입니다.
⇒ ★이 지석 덕분에 무령왕릉은 «주인이 누구인지 무덤 자체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삼국시대 왕릉 중 사실상 유일한 사례가 됐습니다. 지석은 무령왕이 523년 사망해 525년 안장됐고, 왕비는 526년 사망해 529년 안장됐다는 연대까지 함께 전합니다. 벽돌을 쌓는 «기술»만으로는 후대에 이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을 텐데, 그 기술 옆에 문자 기록을 나란히 둔 것이 이 무덤을 다른 왕릉과 갈라놓습니다.
도굴을 피한 대가 — 고스란히 남은 유물
무령왕릉으로 들어가는 통로(널길)는 길이 290㎝·너비 104㎝·높이 145㎝로, 사람 한 명이 몸을 낮춰야 지날 만큼 좁고 낮습니다. 방(현실)에 비해 훨씬 작은 이 통로가 무덤의 «입구»이자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셈입니다.
⇒ ★무령왕릉이 도굴을 피한 결정적 이유는 통로 구조가 아니라 «오인»이었습니다 — 인공으로 쌓아 올린 봉분을, 도굴꾼이 바로 옆 송산리 6호분을 «감싸기 위해 만든 언덕»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백제인이 의도적으로 위장한 것이 아니라, 후대 도굴꾼이 우연히 잘못 짚은 결과에 가깝습니다. 이 덕분에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 거의 유일하게 도굴을 피했고, 1971년 발굴 당시 벽돌 구조물뿐 아니라 그 안의 부장품까지 수천 점 단위로 고스란히 발견됐습니다(정확한 종수·점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자료마다 다르게 전합니다). 구조(벽돌 아치·배수구)와 기록(지석)만 남았다면 «어떻게 지었는가»는 알 수 있어도 «무엇을 담았는가»는 알 수 없었을 텐데, 도굴을 피한 덕에 이 둘이 함께 전해졌습니다.
실무 적용 — «반복되는 규칙»으로 복잡한 형태를 만드는 설계
- ★★곡선이나 복잡한 형태가 필요할 때, «재료 자체의 모양을 바꾸는» 방법과 «쌓는 방향을 바꾸는» 방법을 함께 검토하십시오. 무령왕릉은 벽돌의 형태(직육면체→제형)와 배치 순서(4:1 반복)를 동시에 조정해 아치를 만들었습니다.
- ★새로운 재료·공법을 쓰면 그것이 만드는 «새로운 약점»까지 함께 대비하십시오. 벽돌무덤은 흙무덤보다 정교했지만 누수라는 새 문제가 생겼고, 배수구라는 별도의 대비책이 함께 설계됐습니다.
- 기록을 구조물과 «함께» 남기면, 구조물만으로는 못 밝히는 사실(주인·연대)까지 후대에 전달됩니다.
정리하면
- 무령왕릉은 벽돌 네 장을 눕혀 쌓고 한 장을 세워 쌓는 방식을 반복해 벽체를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입니다.
- 천장을 만들 때는 7~8단째부터 사다리꼴(제형) 벽돌로 바꿔 써서, 벽돌 사이 빈틈 없이 터널형 아치 곡선을 완성했습니다.
- ⇒ 벽돌무덤이 흙무덤보다 정교했던 대신 누수 문제가 새로 생겼고, 무령왕릉은 별도의 배수구(남북 187㎝)로 이를 대비했습니다.
- 지석의 매지권 기록 덕분에, 무령왕릉은 무덤 자체의 문서로 주인과 연대가 확인되는 삼국시대 왕릉 중 사실상 유일한 사례입니다.
본 콘텐츠는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축조 구조를 국사편찬위원회·한국학중앙연구원 계열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해설입니다. 봉분(외부 마운드) 자체의 정확한 크기와 지석 매지권의 전체 원문은 두 출처의 수치가 엇갈리거나 이번 조사 범위를 벗어나 다루지 않았습니다. 최종 확인일: 2026-09-26.
작성: Timonology 편집팀 — 「벽돌을 그냥 쌓았다」가 아니라 「어떤 순서로 번갈아 쌓았는가」로 읽었습니다.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무령왕릉」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공주문화대전, 「무령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