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 정면 전경

미륵사지 석탑, 돌을 목수처럼 짜 맞췄다 — 사리봉영기 한 장이 밝힌 건립연도

참고자료 · 자료 시점
핵심 출처 — 국가유산청 보도자료,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국보 지정」, 2022.12.27 — 국보 구성품 9점, 발견 경위, 사리봉영기 명문, 사리내·외호 구조, 국가유산포털,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 상세 (heritage.go.kr, ccbaCpno=1113503400000) — 2018년 보물 지정 → 2022.12.27 국보 승격, 국가유산 지식이음(portal.nrich.go.kr, 국립문화재연구원),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학술조사연구보고서 — 사리공 출토 전체 유물 수습량 9,900여 점
자료 시점 — 639년 사리봉영기 명문 + 2009년 발견 + 2022년 국보 지정 보도자료
정리 — Timonology 편집팀 · 2026.9

목탑은 나무로 짓고, 석탑은 돌로 짓습니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은 이 둘을 섞었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재료는 돌이지만, 짜 맞추는 방식은 목조 건축을 그대로 옮겨 온 석탑입니다. 그리고 2009년, 이 탑을 해체하다가 나온 유물 한 장이 1,300년 넘게 추정으로만 남아 있던 건립 연도를 확정 지었습니다.

돌 2,800여 개를 목수처럼 짜 맞추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내에 남아 있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꼽힙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돌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화강암 부재 약 2,800여 개를 마치 목조 건축의 기둥·창방·공포를 짜듯이 짜 맞춘 형태로, 백제의 목조건축 기법이 그대로 반영된 독특한 양식입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2014년)
같은 미륵사지 석탑을 다른 각도·시기(2014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화강암을 층층이 짜 맞춘 결구 방식을 다른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Hangidan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 ★돌은 나무와 물성이 다릅니다. 나무는 톱과 끌로 깎아 홈을 파고 맞추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지만, 화강암은 그렇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돌을 나무처럼 짜 맞추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당시 석탑이라는 형식 자체가 아직 완전히 독립된 조형 언어를 갖추기 전, «목탑을 돌로 옮겨 짓는» 과도기적 발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구조 자체로 보여 줍니다. 재료를 바꾸면서도 익숙한 방식(목조 결구)을 버리지 못한, 기술 전환기의 흔적인 셈입니다.

해체하다가 «사리공»에서 나온 것

이 탑은 오랜 세월 붕괴 위험이 있는 상태로 방치되다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보수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2009년, 1층 심주석(心柱石) 중앙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의 학술조사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사리공 안에서 수습된 유물은 사리호를 비롯해 구슬·장신구·직물 조각까지 합쳐 총 9,900여 점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사리 신앙의 핵심 기물인 금제 사리봉영기 1점, 금동사리외호 1점, 금제 사리내호 1점, 청동합 6점 — «9점»이 따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라는 이름으로 국보 지정을 받았습니다. 국가유산청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국보 구성품 중 금동사리외호와 금제 사리내호는 둘 다 몸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서 여는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다른 사리기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 평가됩니다.

⇒ ★«9,900여 점»과 «9점»은 같은 발견을 가리키지만 층위가 다릅니다. 9,900여 점은 사리공 안에서 실제로 수습된 «전체 부장 유물»의 수량이고, 9점은 그중에서도 사리 신앙의 핵심 기물만 추려 국보로 지정한 «대표 구성품»의 수량입니다.

⇒ 목탑의 사리는 대개 탑 «위쪽»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석탑도 심주석(가장 아래, 탑의 중심을 잡는 기초석) 쪽에 사리공을 뒀다는 점은, 이 글이 앞서 다룬 법주사 팔상전의 «심주 아래 사리공» 방식과 같은 계열로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목탑이든 그것을 모방한 석탑이든, 가장 무거운 것을 받치는 자리에 가장 신성한 것을 함께 둔 셈입니다.

유물 한 장이 «추정»을 «확정»으로 바꿨다

발견된 유물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였습니다. 국가유산청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봉영기에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己亥年»(기해년,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간지가 서기 639년에 해당한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그동안 양식 비교로 대략 7세기 전반으로만 추정하던 이 탑의 건립 시기가 «639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로 확정됐습니다.

⇒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건축물의 나이를 알아내는 방법이 크게 두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양식·기법을 다른 유적과 비교해 «대략 몇 세기»로 좁히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건축물 «안에서» 나온 기록물이 스스로 연대를 증언하는 방법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전자(양식 비교)로만 추정되다가, 해체 작업이라는 «건축물 내부에 접근할 기회» 덕분에 후자(자체 증언 기록)로 확정된 드문 사례입니다.

왜 «서탑»만 이렇게 자세히 밝혀졌나

미륵사지에는 원래 탑이 여러 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 온전한 형태로 남아 해체·보수까지 이뤄진 것은 서탑입니다. 동쪽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탑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터만 남았고, 그 자리에는 후대에 콘크리트로 복원한 구조물이 서 있었을 뿐입니다. ⇒ 결국 «사리봉영기가 나와 연대가 확정된 것»은 온전히 남아 해체할 수 있었던 서탑 한 기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같은 절터 안에 있었어도, 남아서 열어 볼 수 있었던 것과 무너져 사라진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진 정보의 양 자체가 다릅니다.

실무 적용 — 오래된 구조물은 «내부 기록»을 열어 봐야 확정할 수 있다

  • ★★겉모습만으로 내린 연대·성능 추정은 «추정»일 뿐입니다. 미륵사지 석탑도 해체 전까지는 양식 비교에 의존한 추정 연대만 있었습니다. 확정은 내부(심주석 사리공)를 직접 열어 본 뒤에야 나왔습니다.
  • ★재료를 바꾸는 전환기에는 옛 방식이 새 재료에 «그대로» 옮겨붙는 경우가 흔합니다. 돌을 나무처럼 짜 맞춘 이 탑처럼, 완전히 새로운 조형 언어는 한 번에 나오지 않고 이전 기술의 흔적을 한동안 끌고 갑니다.
  • 해체·보수처럼 «되돌릴 수 없어 보이는» 작업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검증 기회일 수 있습니다. 붕괴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행한 해체가, 1,300년 묵은 질문(정확한 건립 연도)에 답을 준 계기가 됐습니다.

정리하면

  • 미륵사지 석탑은 화강암 부재 약 2,800여 개를 목조건축처럼 짜 맞춘 백제의 석탑으로, 돌이라는 재료에 목조 결구 방식을 그대로 옮긴 과도기적 구조입니다.
  • 1층 심주석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유물은 총 9,900여 점이며, 이 가운데 금제 사리봉영기·금동사리외호·금제 사리내호·청동합 등 대표 구성품 9점이 사리장엄구로 묶여 2018년 보물을 거쳐 2022년 국보로 승격됐습니다.
  • ⇒ 그중 금제사리봉영기의 «己亥年»(639년) 명문이, 양식 비교로만 추정되던 건립 연도를 구체적인 해로 확정지었습니다.

본 콘텐츠는 국가유산청 보도자료(2022.12.27)와 국가유산포털의 국보 지정 정보를 정리한 해설입니다. 사리봉영기 명문 전문(63자 전체), 청동합 6점 각각의 세부 내역, 해체·보수 공사의 전체 경과(20년에 걸친 작업의 단계별 세부사항)까지는 이번 조사 범위 밖이라 다루지 않았습니다. 동탑의 붕괴·콘크리트 복원 관련 서술은 이번 세션에서 직접 1차자료로 재확인하지 못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로, 다음 라운드에서 국가유산포털·국립문화유산연구원 자료로 보강이 필요합니다. 최종 확인일: 2026-09-17.

작성: Timonology 편집팀 — 겉모습으로 내린 추정과, 안을 열어야 나오는 확정은 다른 등급의 지식이라는 관점으로 읽었습니다.

참고

  • 국가유산청 보도자료,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국보 지정」(2022.12.27)
  • 국가유산포털, 국보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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