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20만 덩어리와 인부의 이름까지 적었다 — 『화성성역의궤』가 200년 뒤 성벽을 되살린 방법
1796년 가을, 수원에 성이 하나 완성됐다. 둘레 5.74킬로미터, 다듬은 돌 20만 덩어리가 넘게 들어간 공사였다. 애초 10년을 잡았는데 2년 8개월 만에 끝났다.
놀라운 것은 성 자체가 아니다. 5년 뒤인 1801년, 이 공사에 관한 책이 간행됐다. 무엇을 얼마에 샀는지, 누가 며칠 일하고 얼마를 받았는지, 어떤 기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인부의 이름과 사는 곳까지 들어갔다. 제목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다.
이 책이 없었다면 지금 수원에 서 있는 성은 상당 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6·25 전쟁으로 무너진 자리를 다시 세울 때, 사람들이 펼친 것이 이 책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이 건물을 되살린 흔치 않은 사례다.
먼저 공사부터 — 2년 8개월에 87만 냥
화성 축성은 1794년(정조 18) 시작해 1796년 10월 10일(음력 9월 10일) 끝났다. 규모를 숫자로 보면 이렇다.
- 성곽 둘레 5.74km, 성벽 높이는 구간에 따라 대략 4~6m.
- 석재 201,403덩어리가 쓰인 것으로 기록됐다.
- 공사비 약 87만 냥, 여기에 일꾼에게 지급한 쌀 1,500섬이 더해졌다.
- 4대문 외에 공심돈 3개, 각루 4개, 포루 5개, 암문 5개 등 기능이 다른 시설이 촘촘히 배치됐다.
주목할 대목은 마지막 숫자다. 임금을 지급했다. 부역으로 사람을 끌어다 쓰지 않고 품삯을 계산해 주었다는 사실이 의궤에 남아 있다. 임금을 준다는 것은 곧 일한 양을 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며칠, 몇 사람, 어떤 일. 기록의 밀도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의궤는 무엇을 적었나
『화성성역의궤』는 10책 분량으로 간행됐다. 조선의 여러 영건(營建)의궤 가운데 가장 상세한 축에 든다. 담긴 내용을 오늘날의 문서 이름으로 옮기면 대략 이렇게 된다.
- 예산·정산서 — 총공사비와 항목별 지출.
- 자재 명세 — 돌·기와·목재·철물의 종류와 수량.
- 노무 대장 — 일한 사람의 이름과 거주지, 작업 일수, 지급한 품삯.
- 도면집 — 성곽 시설물의 그림과 치수.
- 장비 도설 — 거중기·유형거 같은 기구의 분해도와 사용법.
- 행정 기록 — 오간 공문, 의례 절차, 담당 관원의 명단.
현대의 건설 프로젝트에 비유하면 준공도서와 정산서, 작업일보를 한 권에 묶어 국가가 활자로 찍어 낸 셈이다. 다만 비유는 여기까지가 좋다. 의궤는 공정 관리를 위한 실시간 문서가 아니라 끝난 일을 정리해 후대에 남기는 보고서였다. 목적이 다르다. 오늘날의 프로젝트 관리 도구와 같은 것으로 놓으면 과장이 된다.
왜 이렇게까지 적었나
의궤는 화성만의 것이 아니다. 조선 왕실은 국가의 주요 행사와 사업을 치를 때마다 그 전말을 의궤로 남겼다. 혼례, 장례, 책봉, 건물 조성, 어진 제작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규모를 보면 이 제도의 성격이 드러난다. 보물로 지정된 조선왕조의궤는 1,760건 2,756책에 이르고, 시기는 1601년부터 1910년까지 걸쳐 있다. 300년 동안 같은 형식으로 계속 만들었다는 뜻이다.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고, 2016년 5월 3일에는 국내에서 보물로 지정됐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다. 다음에 같은 일을 할 때 무엇을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책임을 남기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맡았고 돈이 어디로 갔는지가 이름과 함께 적히면, 그 자체가 감사 장치가 된다.
기록이 없었다면 복원도 없었다
화성은 20세기에 크게 훼손됐다. 6·25 전쟁으로 여러 시설이 부서졌고, 그 이전부터 도시가 성벽을 밀고 들어왔다.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이 이뤄질 때 기준이 된 것이 『화성성역의궤』다. 도면과 치수, 자재 규격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비슷하게 짓기’가 아니라 원래 도면대로 짓기가 가능했다.
복원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서장대는 2006년 방화로 불탄 뒤 이듬해 다시 세워졌고, 남수문은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해 2012년 완공됐다. 성곽 바깥, 정조가 머물던 화성행궁은 더 긴 시간이 걸렸다. 576칸 규모였던 이 건물군은 일제강점기에 낙남헌을 제외하고 대부분 헐렸다. 1996년 축성 200주년에 맞춰 복원이 시작돼 2003년 10월 482칸이 공개됐고, 우화관과 별주, 장춘각 등 94칸의 2단계 복원이 2024년 4월 마무리되며 전체 복원이 끝났다. 착수부터 완료까지 28년이 걸린 셈이다.
수원 화성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적용된 기준은 (ⅱ)와 (ⅲ)이다. 여기서 자주 오해가 생긴다. 복원된 건물이 많은데 어떻게 등재됐느냐는 것이다. 답은 기록에 있다. 무엇을 근거로 어디까지 되살렸는지 문서로 설명할 수 있었기에, 복원의 정당성을 논증할 수 있었다.

문서 자체의 수난 — 외규장각 의궤
기록이 남았다고 해서 안전했던 것은 아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의궤 약 300책을 가져갔다. 이 책들은 이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었고, 2011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만 형식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완전한 소유권 반환이 아니라 5년 단위로 갱신하는 대여 방식이었다. 실물은 한국에 있지만 법적 지위는 다르다. 이 조건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현실적 해법이었다는 견해와 원칙을 양보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금도 함께 있다.
남아 있는 의궤들은 여러 기관에 나뉘어 보관된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가장 많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뒤를 잇는다. 『화성성역의궤』도 규장각, 국립중앙박물관, 연세대에 전해진다.
지금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의궤의 발상 — 고칠 사람을 위해 지금 재어 두는 것 — 은 과거형이 아니다.
2024년 5월 17일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개편되면서 관리 체계가 문화유산·자연유산·무형유산 세 갈래로 정리됐다. 건물과 그것을 짓는 기술을 함께 다루겠다는 방향이다.
기록의 정밀도도 올라갔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2026년 5월 28일 세계유산 창덕궁과 종묘 석재의 암석도면과 산지 정보를 공개했다. 어느 부재가 어떤 암석이고 어느 산지에서 왔는지를 도면 단위로 정리한 자료다. 200년 전 의궤가 “돌 몇 덩이, 값 얼마”를 적었다면, 지금은 “이 돌은 어느 산의 어떤 암석”까지 적는다. 다음 수리 때 재료를 잘못 고르지 않기 위해서다.
세계유산 목록도 계속 갱신된다. 2023년 가야고분군에 이어 2025년에는 반구천의 암각화가 등재됐다. 등재 심사에서 늘 요구되는 것이 진정성과 보존관리 계획, 즉 문서다. 화성이 1997년에 통과한 관문과 성격이 같다.
오해와 쟁점
- “의궤 덕분에 완벽하게 복원됐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도면과 치수가 남아 있어도, 실제 복원에는 당대의 재료 수급과 시공 기술, 판단이 개입한다. 지금 서 있는 문루와 누각은 기록에 근거해 20세기 이후에 지은 건물이다. 이 사실을 지우면 복원이 아니라 신화가 된다.
- 임금 지급을 근대적 임노동으로 곧장 등치하기는 어렵다. 화성 공사에서 품삯이 지급된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조선 후기 노동 편성 전반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는 연구자마다 평가가 다르다. 특별한 국가사업의 사례로 보는 시각과 변화의 신호로 보는 시각이 함께 있다.
- 거중기의 비중은 흔히 과장된다. 의궤에 도설이 실려 있어 상징이 됐지만, 실제 공사에 투입된 대수는 많지 않았고 수평 운반의 주력은 수레류였다는 기록이 있다.
- 공사 기간과 비용 수치도 자료마다 표기가 갈린다. 환산 기준과 포함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숫자를 쓸 때는 그 숫자가 무엇을 포함한 값인지 함께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기록을 남기는 법 — 화성에서 가져올 것
- ‘끝난 뒤 한 번’ 정리하는 문서를 만들어라 — 진행 중 메모와 완료 보고서는 다른 물건이다. 의궤의 힘은 실시간 기록이 아니라, 끝난 일을 한 형식으로 묶어 남긴 데서 나왔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자재·비용·담당·도면을 한 곳에 모아 봉인해 두라.
- 수치에는 반드시 단위와 범위를 붙여라 — 87만 냥이 무엇을 포함한 금액인지 지금도 따져야 하듯, 단위 없는 숫자는 20년만 지나도 해석 불가능해진다.
- 사람 이름을 지우지 마라 — 의궤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인부의 이름과 거주지까지 적었다는 점이다. 책임과 이력이 함께 남으면 문서의 신뢰도가 달라진다.
- 화성에 간다면 성벽의 재료 경계를 보라 — 다듬은 화강암과 전돌(벽돌)이 어디서 갈리는지, 어느 구간이 옛 부재이고 어디가 새로 끼운 돌인지 색과 마모로 구분된다. 복원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 유산을 보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다.
- 원문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규장각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보를 먼저 찾아보라 — 의궤는 국내외 여러 기관에 나뉘어 있고, 기관마다 공개 범위와 열람 조건이 다르다. 인용하기 전에 소장처와 판본을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화성의 성벽은 돌로 되어 있지만, 그 성벽을 두 번 세운 것은 종이였다. 1796년의 공사는 사람들이 했고, 1970년대의 복원은 문서가 했다.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일이 무엇을 짓는 일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은 200년 뒤에 증명했다.
이 글은 공개된 서지·등재 정보와 기관 발표 자료를 정리한 정보·해설 글이다. 의궤의 판본별 구성과 공사 관련 수치는 자료에 따라 표기가 다를 수 있으므로, 인용 시에는 소장 기관의 원문 정보를 확인하기 바란다.
사진은 Wikimedia Commons의 CC0·퍼블릭도메인 이미지이며, 촬영 시점이 본문에서 설명하는 복원 완료 시점과 다를 수 있어 캡션에 밝혔다.
작성 · Timonology 편집팀 — 한국 전통 과학·공학 유산을 현대 공학의 언어로 해설합니다. 복원·추정이 갈리는 사안은 단정하지 않고 학설을 함께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