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성·치·여장은 각각 무엇을 막으려고 생겼나 — 성곽을 사거리로 읽는 법
성벽 위를 걷다 보면 이상한 것들이 보인다. 벽이 갑자기 네모나게 튀어나온 자리, 성문 앞을 둥글게 한 번 더 감싼 벽, 그리고 성벽 위 낮은 담에 뚫린 구멍 세 개.
이것들은 미관 요소가 아니다. 각각이 특정한 공격 방식에 대응해 나온 구조적 해답이고, 그 해답의 논리는 대부분 기하학과 사거리로 설명된다. 수원 화성처럼 잘 남아 있는 성곽을 예로 삼아, 무엇이 무엇을 막으려고 생겼는지 하나씩 뜯어보자.
문제의 출발점 — 직선 성벽은 자기 발밑을 못 본다
높은 벽 하나만 세워 두면 어떻게 되는가.
적이 벽에서 멀리 있을 때는 문제가 없다.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쏘면 사거리와 시야 모두 방어측이 유리하다. 그런데 적이 벽 바로 밑까지 붙으면 상황이 뒤집힌다. 벽 아래에 붙은 적을 공격하려면 수비병이 몸을 성벽 밖으로 내밀어야 하고, 몸을 내미는 순간 자기가 표적이 된다.
즉 성벽 바로 아래는 사각지대다. 그리고 공성전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 — 사다리를 걸고, 벽을 파고, 문을 부수는 일 — 은 전부 그 사각지대에서 벌어진다.
성곽 부속시설의 절반은 이 하나의 문제를 푸는 장치다.
치 — 벽면과 나란히 쏘기 위한 돌출부
치(雉)는 성곽의 일부분을 네모나게 밖으로 돌출시킨 구조물이다. 치성이라고도 한다.
돌출시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치 위에 선 사람은 성벽면과 나란한 방향으로 사격할 수 있게 된다. 벽에 딱 붙어 있는 적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다. 몸을 내밀 필요가 없고, 벽 아래를 훑는 사격선이 확보된다. 성벽 아래 사각지대가 사라진다.
여기서 배치의 원리가 나온다. 치 하나가 담당하는 것은 자기 좌우 벽면이다. 그런데 그 담당 구간은 무한하지 않고 무기의 유효사거리까지다. 그러므로 이웃한 두 치 사이의 벽면이 빈틈없이 덮이려면, 두 치의 간격이 유효사거리의 두 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 넘어가면 두 치의 중간 지점에 아무도 닿지 못하는 구간이 생기고, 공격측은 정확히 그 지점을 노린다.
전근대 성곽에서 치의 간격이 대체로 일정한 범위 안에 들어오는 이유가 이것이다. 간격은 미감이나 관습이 아니라 그 시대 주력 무기의 사거리가 결정한 값이다. 활에서 화약 무기로 주력이 바뀌면 이 값도 따라 움직인다.
치는 고구려 산성에서 조선 읍성까지 오래 쓰였고, 한양도성·수원 화성·광양 마로산성 등에서 확인된다. 수원 화성만 해도 치성이 아홉 곳 있다.
옹성 — 성문의 직선 돌격을 끊는 장치
성문은 성곽의 구조적 최약점이다. 이유는 셋이다. 벽에 뚫린 구멍이고, 막고 있는 것이 돌이 아니라 목재 문짝이며, 통로라서 위치가 공격측에 뻔히 알려져 있다.
옹성은 이 약점을 감싸는 시설이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문 바깥을 반원형이나 ㄷ자형으로 한 번 더 둘러 쌓는다. 중국에서는 달 모양을 따 월성(月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옹성이 실제로 하는 일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문에 이르는 직선 경로를 없앤다. 옹성의 출입구는 본문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고 옆으로 어긋나 있다. 성문을 부수는 주력 장비인 충차는 무겁고, 무거운 것을 굴려 때리려면 가속할 직선 거리가 필요하다. 진입로가 꺾이면 그 거리가 사라진다. 사람이 미는 무거운 물체에게 90도 방향 전환은 대단히 비싼 동작이다.
둘째, 적을 갇힌 공간에 몰아넣는다. 옹성 안으로 들어온 병력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이고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놓인다. 밀집한 상태에서 여러 방향의 사격을 동시에 받게 되며, 좁아서 흩어지지도 못한다. 병력이 많을수록 오히려 불리해지는 공간이다.
셋째, 문이 뚫려도 한 겹이 남는다. 옹성 벽이 무너지거나 옹성 문이 열려도 본문이 아직 닫혀 있다. 방어 실패가 곧바로 함락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단계적 구조다.
수원 화성의 장안문과 창룡문, 남한산성 등에서 옹성의 실제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짚어둘 것 — ‘4,000년 전 기원설’에 대하여
옹성의 기원을 두고 인터넷에서 종종 ‘동이족이 약 4,000년 전에 성곽에 적용했다’는 주장이 돈다. 이 주장은 학계에서 정립된 설명이 아니며, 근거로 제시되는 자료의 해석에도 이견이 크다. 옹성 형태의 이중 성문 구조는 여러 문명권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해법에 가깝고, 특정 집단의 발명으로 귀속시키기 어렵다. 성곽 시설의 기원을 다루는 서술을 만나면 어느 유적의 어떤 층위에서 나온 근거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편이 좋다.
여장 — 구멍 세 개가 각각 다른 거리를 맡는다
여장(女墻)은 성곽 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사수가 몸을 숨기기 위한 시설이다.
핵심은 거기 뚫린 구멍이다. 여장에는 총안이 여럿 뚫려 있는데, 자세히 보면 뚫린 각도가 서로 다르다. 먼 곳을 향한 것이 원총안, 가까운 곳만 보도록 낮춰 뚫은 것이 근총안이다. 이름 그대로 근총안은 가까운 곳, 원총안은 먼 곳을 담당한다.
왜 하나로 통합하지 않았을까. 총안은 구멍이고, 구멍은 뚫린 방향으로만 볼 수 있다. 구멍의 관통 각도가 곧 그 총안이 담당하는 사격 구역을 결정한다. 성벽 바로 아래를 겨누려면 구멍이 아래쪽으로 가파르게 뚫려야 하고, 멀리 있는 표적을 겨누려면 거의 수평에 가까워야 한다. 하나의 구멍으로 두 각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여기에 방호와 시야의 상충이 겹친다. 구멍을 크게 뚫으면 사계가 넓어지지만 그만큼 사수가 노출되고 담의 강도도 떨어진다. 작게 뚫으면 안전하지만 담당 구역이 좁아진다. 그래서 작은 구멍 여러 개를 각각 다른 각도로 뚫어 분담시키는 방식이 답이 된다.
즉 여장의 총안은 장식적 반복이 아니라 거리별 역할 분담이다. 근총안이 치와 같은 문제 — 성벽 아래 사각 — 를 다른 방식으로 푸는 장치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하나의 취약점에 서로 다른 층위의 대책을 중복해서 걸어 둔 것이다.
화성이라는 종합 사례
수원 화성은 1794년에 착공해 1796년 10월 10일 준공됐다. 둘레는 5.74km다. 시설 구성을 보면 방어 논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문 4개(장안문·팔달문·창룡문·화서문)에는 문마다 방어 장치가 겹쳐 있고, 성문 좌우를 지키는 적대가 4개 배치돼 있다. 물이 드나드는 화홍문과 남수문 2개는 수문이면서 동시에 방어 지점이다. 사람이 몰래 드나드는 암문이 5개, 감시와 사격을 겸하는 각루가 4개다.
특히 화성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약 무기를 전제한 시설들이다. 화포를 두는 포루(砲樓) 5개, 병사가 대기하는 포루(舖樓) 5개가 별도로 있고, 속이 빈 망루인 공심돈이 3개(서북·동북·남) 세워졌다. 공심돈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여러 층에서 사격할 수 있는 구조로, 치의 원리를 수직 방향으로 확장한 것에 가깝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실무 적용 — 성곽을 답사할 때 확인할 것
- 먼저 사각지대를 찾는다 — 성벽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위에서 나를 볼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세어 본다. 치와 근총안의 위치가 그 답으로 나온다.
- 치와 치 사이 거리를 눈으로 재 본다 — 두 돌출부 사이 중간 지점이 양쪽에서 다 닿는 거리인지 가늠해 보면, 그 성곽이 상정한 무기의 사거리가 역산된다.
- 옹성에서는 진입 경로를 걸어 본다 — 바깥 출입구에서 본문까지 몇 번 꺾이는지, 직선으로 달릴 수 있는 최장 거리가 얼마인지 확인한다. 충차 방어의 실효가 거기서 나온다.
- 총안에 실제로 눈을 대 본다 — 근총안과 원총안에 각각 눈을 대면 보이는 범위가 확연히 다르다. 이 글의 내용 중 가장 확실하게 몸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 화약 무기 이후 시설을 구분한다 — 포루·공심돈처럼 화기를 전제한 시설과, 치·여장처럼 그 이전부터 있던 시설을 나눠 보면 성곽의 시기와 성격이 읽힌다.
답사 정보
수원 화성은 성곽 둘레를 따라 도보로 한 바퀴 돌 수 있고, 이 글에서 다룬 시설이 대부분 한 코스 안에 모여 있다. 옹성은 창룡문·장안문에서, 공심돈은 서북공심돈에서, 여장의 총안은 성벽 구간 어디서나 확인된다. 남한산성과 한양도성, 낙안읍성 등에서도 각각 다른 시기와 지형 조건의 해법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유산의 지정 현황과 정비·복원 이력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조회할 수 있다. 2024년 5월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개편되면서 관련 정보 체계도 함께 정비되고 있으니, 답사 전 최신 안내를 확인하는 편이 낫다.
성곽은 결국 하나의 질문에 대한 오랜 답변들의 퇴적이다. 벽 아래에 붙은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치도, 옹성도, 여장의 구멍 세 개도 전부 그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답이다.
수원 화성의 축성 연도·규모·시설 수량과 각 시설의 정의는 UNESCO 세계유산 ‘화성’ 등재 자료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수원 화성」 항목, 『화성성역의궤』에 따랐습니다. 치의 간격과 사거리의 관계는 방어 기하로부터 도출한 원리적 설명이며, 특정 성곽의 실측 간격 수치를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