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와 백자 사이의 200년 — 분청사기는 흰 그릇을 흉내 낸 것이 아니다
한국 도자사를 요약할 때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고려는 청자, 조선은 백자.
그러면 그 사이는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이 남습니다. 고려가 끝나고 백자가 자리를 잡기까지 200년 가까운 시간이 있었고, 그 시기에 가장 널리 쓰인 그릇은 청자도 백자도 아니었습니다.
분청사기입니다.
이름부터가 근대에 붙은 것이다
먼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이 그릇을 분청사기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임말이고, 일제강점기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붙인 이름입니다. 회청색 바탕에 분(백토)을 발랐다는 뜻으로, 이 그릇의 제작 방식을 그대로 옮긴 작명입니다.
당대 기록에서는 그냥 ‘사기(沙器)’로 나옵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를 등급까지 매겨 적어 두었는데, 거기에도 오늘날 우리가 쓰는 분류 이름은 없습니다.
이 사실이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합니다. 분청사기라는 범주 자체가 후대의 분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청자와 분청과 백자가 뚜렷이 나뉘는 세 종류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해 가는 하나의 사기였습니다.
재료로 보면 청자에 더 가깝다
분청사기의 몸통, 즉 태토는 청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철분이 섞인 흙이라 구우면 회색이나 회갈색이 됩니다.
문제는 이 색으로는 흰 그릇을 만들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백자를 만들려면 철분이 거의 없는 백토가 필요한데, 그런 흙은 아무 데나 있지 않고 운반 비용도 듭니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표면만 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값싼 태토로 그릇을 빚고, 그 위에 백토를 물에 갠 것(분장토)을 입힙니다. 그 위에 유약을 씌워 굽습니다. 유약은 청자에 쓰던 계열이라 약간 푸른 기가 도는 회청색을 띱니다. 그래서 완성품은 흰 바탕에 회청색이 감도는 표면이 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청자: 회색 태토 + 청자유 → 푸른 그릇
- 분청: 회색 태토 + 백토 분장 + 청자유 → 흰 기운이 도는 그릇
- 백자: 백토 태토 + 투명유 → 흰 그릇
기술적으로 분청은 백자로 가는 길목이 아니라, 백토가 부족한 조건에서 흰 표면을 얻어 낸 우회로입니다. 목표는 같고 재료 조달 방식이 다릅니다.
백토를 어떻게 입히느냐가 기법을 갈랐다
분청사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입니다. 백토를 입히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었고, 방법마다 다른 무늬가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일곱 가지로 나눕니다.
- 상감(象嵌): 무늬를 파낸 자리에 백토를 채워 넣습니다. 고려청자 상감의 연장선이고, 분청 초기에 많습니다.
- 인화(印花): 도장을 찍어 오목한 자국을 촘촘히 낸 뒤 백토를 문질러 채웁니다. 상감을 찍어 내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라 작업 속도가 크게 빨라집니다. 대량 제작과 직결된 기법입니다.
- 박지(剝地): 표면 전체에 백토를 입힌 뒤, 무늬를 남기고 바탕을 긁어냅니다. 흰 무늬가 도드라집니다.
- 조화(彫花): 백토 층을 선으로 긁어 무늬를 그립니다. 긁힌 선 아래로 회색 태토가 드러납니다.
- 철화(鐵畵): 백토 위에 철분 안료로 붓 그림을 그립니다. 구우면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나옵니다.
- 귀얄: 굵고 거친 붓으로 백토를 쓸어 바릅니다. 붓자국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 덤벙(담금 분장): 그릇을 백토 물에 통째로 담갔다 뺍니다. 담근 깊이와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남습니다.
앞의 네 가지는 무늬를 만드는 기법이고, 뒤의 두 가지는 백토를 바르는 행위 자체가 무늬가 되는 기법입니다. 시기적으로도 대체로 앞쪽에서 뒤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이동을 “장식이 자유로워졌다”로만 설명하면 절반입니다. 손이 덜 가는 쪽으로 옮겨 간 것이기도 합니다. 상감은 한 점마다 파고 채우고 다듬어야 하지만, 덤벙은 담갔다 빼면 끝납니다. 제작 시간과 인력이 기법 선택을 밀었을 가능성을 빼놓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술적으로 무엇이 어려웠나
백토를 덧입히는 방식에는 구조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층을 붙여 놓았다는 점입니다.
태토와 분장토는 성분이 다르므로 마르고 구워질 때 줄어드는 정도가 다릅니다. 차이가 크면 분장 층이 갈라지거나 들뜨고, 심하면 떨어져 나갑니다. 분청사기 파편에서 백토 층이 벗겨진 상태가 자주 관찰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분장은 두껍게 바를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다. 너무 얇으면 아래 회색이 비쳐 올라오고, 너무 두꺼우면 박리 위험이 커집니다. 그 사이를 맞추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었습니다.
귀얄과 덤벙이 붓자국과 흘림을 그대로 두는 것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표면을 매끈하게 문질러 고르려면 분장 층을 건드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층이 얇아지거나 떠 버릴 수 있습니다. 손을 덜 대는 쪽이 재료에는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
왜 사라졌는가 — 정리되지 않은 부분
분청사기는 16세기를 지나며 자취를 감춥니다.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관요 성립을 드는 견해가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 왕실용 자기를 전담하는 관요가 경기 광주 일대에 자리 잡으면서, 좋은 흙과 숙련된 사기장이 백자 쪽으로 집중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수요의 정점이 백자로 옮겨 가면 지방 가마는 판로를 잃습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을 드는 견해도 있습니다. 전란으로 지방 가마가 파괴되고 사기장이 흩어지면서 생산 기반이 끊겼다는 설명입니다.
두 설명은 배타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어느 쪽이 결정적이었는지, 소멸이 언제 완료되었는지는 자료에 따라 판단이 갈립니다. 지방 가마의 생산 기록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고, 편년의 기준도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는 정리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일본 다도에서 분청사기 계열 그릇이 높이 평가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국내 생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논의됩니다. 다만 평가받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원인이었다는 주장은 다른 층위이므로, 여기서는 전자만 적어 둡니다.
이 설명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
- 초기 분청과 후기 분청. 상감 위주의 초기 그릇은 고려청자 공방의 연속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고, 위에서 말한 ‘백토 우회로’라는 성격은 중기 이후에 더 뚜렷합니다. 하나의 설명으로 200년을 덮기 어렵습니다.
- 지방 가마별 차이. 분청사기는 전국 여러 곳에서 만들어졌고, 지역마다 흙과 선호 기법이 달랐습니다. 어느 지역 유물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전형’이 달라집니다.
- 분류의 경계. 백토를 얇게 입힌 그릇과 백자의 경계, 분장을 거의 하지 않은 그릇과 청자의 경계는 실물에서 뚜렷하지 않습니다. 도록의 분류가 곧 당시의 구분은 아닙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분청사기는 백자보다 등급이 낮은 그릇이었나요? 용도에 따라 다릅니다. 관청 이름이 새겨진 분청사기가 남아 있어 공적인 용도로도 쓰였음이 확인됩니다. 다만 왕실 최상급 수요가 백자로 옮겨 간 것은 사실입니다.
Q. 왜 굳이 백토를 발랐나요? 그냥 청자로 두면 안 되나요? 흰 그릇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수요가 어디서 왔는지(중국 백자의 영향인지, 국내 취향의 변화인지)는 견해가 갈립니다.
Q. 인화 기법의 도장은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흙을 구워 만든 도장이 사용된 것으로 봅니다. 다만 남아 있는 실물이 많지 않아 제작 방식 전체가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Q. 분청사기는 지금도 만들어지나요? 현대 도예에서 기법으로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조선 전기의 태토·유약 조건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 기법만 차용한 것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Q. 표면이 벗겨진 유물은 실패작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용 중 마모나 매장 환경에 의한 박리일 수도 있어, 제작 단계의 결함과 구분하려면 단면 관찰이 필요합니다.
본 콘텐츠는 도자사·재료공학 관점의 일반 해설입니다. 편년과 명칭은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특정 유물에 관한 사항은 소장 기관의 공식 설명을 확인하십시오. 최종 확인일: 2026-08-02.
작성: Timonology 편집팀 — 만든 방법으로 물건을 읽습니다.
참고
- 『세종실록지리지』 자기소·도기소 기록
- 고유섭의 ‘분장회청사기’ 명명과 한국 도자사 연구
- 조선 전기 관요(사옹원 분원) 성립에 관한 도자사 연구
- 백토 분장과 소성 수축에 관한 도자 재료학 문헌
- 일본 다도구 수용사에서의 조선 도자 관련 연구
⚠️ 미인용 처리
- 관요 설치 연도 — 자료마다 기준이 달라 세기 단위로만 적었습니다.
- 『세종실록지리지』의 자기소·도기소 개수 — 판본과 집계 기준에 따라 값이 달라져 수치를 넣지 않았습니다.
- 분장토와 태토의 수축률 수치 — 시료별 편차가 커서 구체적인 값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 분청사기 소멸 시점 — 견해가 갈려 특정 연대를 적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