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금속활자 여러 점을 늘어놓은 전시 진열

금속활자를 어떻게 부었나 — 밀랍주조설과 주물사주조설, 실물이 말해주는 것

참고자료 · 자료 시점
핵심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갑인자」(E0000932) — 1434년 제작 경위·참여 인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인자」(E0019217)·「무오자」(E0019176) — 조선 활자의 계보,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서울 인사동 출토 금속활자 조사 자료(2021년 6월, 약 1,600점)
자료 시점 — 15세기 사료 + 2021년 발굴 이후 조사 성과
정리 — Timonology 편집팀 · 2026.7

2021년 6월, 서울 인사동 한복판에서 조선시대 금속활자가 쏟아져 나왔다. 약 1,600점. 세종대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문 활자가 섞여 있었고, 지금까지 확인된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 소식은 ‘가장 오래된’이라는 표현으로 소비됐지만, 기술사 쪽에서 이 발견이 갖는 값어치는 다른 데 있다. 실물이 무더기로 나왔다는 것. 조선 금속활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두고 오래 이어져 온 논쟁이 있는데, 그 논쟁은 문헌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공정마다 물건에 남기는 흔적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물건을 봐야 한다.

활자 하나를 만든다는 일

활자 주조의 어려움은 크기가 아니라 조건에 있다. 활자는 아래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해야 한다.

첫째, 글자면이 선명해야 한다. 획이 뭉개지거나 기포로 끊기면 인쇄면에 그대로 나온다. 둘째, 몸통의 높이가 모든 활자에서 같아야 한다. 하나만 낮아도 그 글자만 흐리게 찍힌다. 셋째, 같은 글자를 여러 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 페이지에 같은 글자가 여러 번 나오므로 활자는 반드시 복수로 필요하다.

조선 활자의 규모를 보면 세 번째 조건의 무게를 알 수 있다. 1403년 조선 최초의 구리활자인 계미자가 약 10만 자, 1434년의 갑인자는 20여만 자에 이르렀다. 20만 개의 금속 조각을 낱개로 부어내면서 높이를 맞춰야 하는 생산 문제다.

1420년의 경자자가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활자를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고쳤다는 서술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형태를 규격화하면 조판할 때 활자가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 인쇄면이 고르게 나온다. 미감의 문제가 아니라 공차 관리의 문제였다.

두 개의 공정, 두 개의 가설

논쟁은 이렇게 갈린다.

밀랍주조법(실랍법). 밀랍으로 글자 원형을 조각한다. 이 원형에 흙이나 석고 계열 주형재를 발라 감싼 뒤 가열하면 밀랍이 녹아 흘러나오고, 원형이 있던 자리에 빈 공간이 남는다. 그 공간에 쇳물을 부어 굳힌 다음 주형을 깨뜨려 활자를 꺼낸다.

특징은 명확하다. 주형은 한 번 쓰고 부서지는 일회용이고, 원형인 밀랍도 녹아 사라진다. 즉 활자 하나마다 원형을 따로 조각해야 한다. 대신 밀랍은 세밀한 조각이 가능해서 획의 표현이 좋고, 주형 표면이 매끄러워 주조면도 곱게 나온다.

주물사주조법. 고운 모래에 점결제를 섞어 다진 주형재에 어미자를 눌러 자국을 낸다. 어미자를 빼내면 그 자리가 빈 공간이 되고, 여기에 쇳물을 붓는다. 어미자는 나무나 금속으로 만들어 두고 반복해서 쓴다. 주형도 모래를 다시 다져 재사용할 수 있다.

특징은 정반대다. 같은 글자를 여러 벌 뽑는 데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어미자가 같으니 형태의 일관성도 높다. 대신 모래 입자 때문에 주조면이 밀랍법만큼 곱게 나오지 않는다.

동양식 주조를 설명할 때 밀랍과 나무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두 재료가 역할을 나눠 맡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밀랍이든 나무든 조각해서 원형(어미자)을 만들고, 그 원형을 모래틀에 찍어 주형을 뜨는 방식이다. 재료가 무엇이든 «원형을 만든다 → 틀에 찍는다 → 쇳물을 붓는다»는 공정의 뼈대는 같다.

판에 조판된 한글 금속활자 복제품
1447년 『월인천강지곡』 활자의 복제품(인천공항 한국문화박물관 전시). 조판된 상태에서 활자들이 서로 높이를 맞춰 눌려 있어야 인쇄면이 고르게 나온다. 사진: Daderot / Wikimedia Commons (CC0)

실물에서 무엇을 보면 판정이 되나

두 공정은 완성품에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실물 관찰과 실험고고학이 결정적이다.

같은 글자들 사이의 형태 편차. 이것이 가장 강력한 지표다. 어미자를 재사용했다면 동일 글자 여러 점의 획 형태와 치수가 거의 겹친다. 반대로 활자마다 원형을 새로 조각했다면 아무리 숙련된 장인이라도 미세한 차이가 누적된다. 여러 점을 겹쳐 재보면 갈린다.

뒷면과 옆면의 흔적. 쇳물이 들어간 통로인 탕구 자국, 여러 활자를 한 번에 붓기 위해 연결한 가지 모양의 흔적, 주형을 분리한 자리에 생기는 이음선. 일회용 주형과 반복 주형은 이 흔적의 양상이 다르다.

표면의 거칠기. 모래 주형은 입자의 흔적을 남긴다. 현미경 수준에서 표면 조도를 비교하면 주형재의 성격이 드러난다.

합금 성분. 구리에 주석과 납을 얼마나 섞었는지는 용융 온도와 흐름성을 결정한다. 주형 방식마다 요구되는 쇳물의 유동성이 달라서, 성분 분석이 공정 추정의 방증이 된다.

실험고고학. 두 방법으로 실제로 활자를 부어 보고, 그 결과물의 흔적을 유물과 대조하는 방식이다. 재현 실험은 어느 쪽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그리고 20만 자라는 규모에서 어느 쪽이 현실적인지를 함께 보여준다.

정직하게 말하면 — 아직 한쪽으로 끝나지 않았다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은 있다. 20만 자 규모의 관영 대량 주조라는 조건 자체가 어미자를 재사용하는 방식에 강하게 유리하다. 밀랍법으로 20만 개의 원형을 따로 조각한다는 것은 비용과 시간 면에서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조선 활자는 주물사법으로 만들었다’는 단정으로 옮기는 것은 성급하다. 몇 가지가 걸린다. 시기마다 방법이 달랐을 수 있고, 초기 활자나 소량 보충 주조에는 다른 방법이 쓰였을 수 있다. 두 방법이 공정 단계별로 섞였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유물 개별로 판정 결과가 갈릴 수 있는 사안이라, 몇 점의 분석 결과를 전체로 일반화하기 어렵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주장된 일부 유물은 진위 자체에 논란이 이어지고 있어, 주조법 논의에서는 분리해 다루는 것이 안전하다.

인사동 출토품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출토 맥락이 확인된 실물이 한꺼번에 다수 확보되었기 때문에, 동일 글자 간 비교라는 가장 결정적인 검증을 통계적으로 해볼 수 있는 자료가 생긴 것이다.

한 가지 주의 — 자주 인용되는 숫자에 대하여

갑인자를 설명할 때 “하루에 3,500자를 만들었고 이는 구텐베르크의 약 10배”라는 비교가 널리 인용된다. 이 서술은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무엇을 센 숫자인지가 불분명하다. 하루에 주조한 활자 개수인지, 하루에 인쇄한 분량인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비교 대상의 조건 — 인원, 설비, 작업 일수 — 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조건이 다른 두 공정을 배수로 비교하는 서술은, 근거를 확인하기 전에는 인용하지 않는 편이 낫다.

조선 활자 기술의 실제 성취는 이런 배수 비교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된다. 20만 자 규모의 활자를 국가가 반복해서 새로 주조했고, 그때마다 자형을 개량했으며, 조판·인쇄를 위한 규격을 관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다.

실무 적용 — 유물 정보를 읽을 때

  • ‘추정’과 ‘확인’을 구분해 읽는다 — 인사동 출토품도 갑인자로 ‘추정’되는 단계다. 보도자료와 논문의 표현 강도 차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하다.
  • 비교 수치는 분모를 확인한다 — 배수로 표현된 비교는 무엇을 세었는지, 조건이 같은지를 먼저 본다.
  • 공정 판정은 복수 지표로 본다 — 형태 편차, 주조 흔적, 표면 조도, 성분 분석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결론이 선다.
  • 논쟁 중인 사안은 논쟁 중이라고 적는다 — 주조법 논쟁은 아직 열려 있다. 열린 것을 닫힌 것처럼 쓰면 나중에 정정 비용이 훨씬 크다.

직접 보러 가는 법

금속활자 실물과 인쇄 공정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청주 고인쇄박물관이 대표적이다. 활자 주조와 조판, 인출 과정을 단계별로 전시하고 있어 이 글에서 다룬 공정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기에 좋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도 조선 활자와 인쇄물을 만날 수 있다.

인사동 출토 활자의 전시 여부와 위치는 조사·보존 처리 진행 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방문 전 각 기관 누리집의 전시 안내를 확인하기를 권한다. 유물의 지정 현황과 소장처는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조회할 수 있다.

활자는 작다. 그러나 그 작은 금속 조각 하나에 어떤 주형을 썼고 쇳물이 어디로 들어갔는지가 고스란히 남는다. 문헌이 침묵하는 자리에서 물건이 말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계미자·경자자·갑인자의 연도와 제작자, 주조 방식 서술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갑인자」 등 활자 항목에 따랐습니다. 주조법에 관한 학계 논의는 현재 진행 중이며, 본문은 각 공정이 남기는 물리적 흔적과 그 판정 근거를 정리한 것으로 특정 학설을 확정된 사실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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